부동산 있으면 은퇴 준비 끝? 집값 상승보다 현금흐름이 먼저다
몇 년 전,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노후 얘기가 나왔다. 그 동료는 경기도에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었는데,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집 있잖아. 은퇴 준비 뭐 더 해야 해?"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맞는 말이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값은 오르고, 팔면 목돈 생기고, 그게 노후 자금이 되지 않나. 그때만 해도 나는 부동산을 '안전한 자산'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은퇴 시뮬레이터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계산이 꼬이기 시작했다. 집 한 채가 자산 목록에 크게 찍혀 있는데, 정작 매달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숫자를 뜯어보니, 집이 '자산'이긴 한데 그 자산이 매달 돈을 내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집 있으면 은퇴 준비 다 됐다"는 말을 더 이상 그대로 믿지 않게 됐다.
집값이 올라도, 팔기 전까지는 현금이 아니다
부동산에 대한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집값=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세 8억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다고 해서 지금 당장 8억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집은 팔아야만 현금이 된다. 그리고 팔기 전까지 그 집은 내 은행 계좌에 단 한 푼도 보태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집은 꾸준히 돈을 잡아먹는다. 구체적인 숫자로 살펴보자. 시가 8억 원짜리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고, 잔여 주택담보대출이 3억 원, 금리가 연 4%라고 가정해보자. 이자만 계산해도 연 1,200만 원, 즉 매달 100만 원이 그냥 나간다. 여기에 재산세·종합부동산세를 합한 보유세가 연 100만~150만 원, 아파트 관리비가 연 60만~100만 원가량 추가된다고 치면, 이 집 한 채를 유지하는 데만 연간 1,400만 원 안팎, 매달 약 117만 원이 빠져나가는 셈이다.
이 117만 원은 자산 증식이 아니다. 순수한 '보유 비용'이다. 집값이 오르고 있을 때는 이 비용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은퇴 후 수입이 뚝 끊기는 순간, 이 117만 원은 생활비를 갉아먹는 구멍이 된다.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라는 현실
영어로 "House Rich, Cash Poor"라는 표현이 있다. 자산 목록에는 수억짜리 집이 버젓이 올라 있는데, 실제 통장 잔액은 바닥이라는 뜻이다. 이 현상은 한국의 중산층 은퇴자 사이에서 꽤 흔하게 나타난다. 평생 아파트 한 채를 지키며 살았는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매달 생활비가 부족해서 자녀에게 손을 벌리거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
왜 이렇게 될까? 직장 다닐 때는 급여로 대출 이자도 내고 관리비도 내고, 남은 돈으로 생활도 했다. 그런데 퇴직 후에는 급여가 사라진다. 집은 그대로인데 수입은 없으니, 퇴직금이나 저축을 털어서 이자를 내고 관리비를 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축한 현금이 줄어든다. 집값은 계속 오를 수 있지만, 지금 당장 밥 먹고 병원 가고 손주 용돈을 주려면 통장에 현금이 있어야 한다. 집값 호가는 내 생활비를 대신 내주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숫자로 써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설마 내가 그렇게 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시뮬레이터를 돌려보니 내가 딱 그 궤도에 올라 있었다.
집을 지키다가 결국 집을 줄이는 현실
현금이 부족한 상태로 노후를 버티다 보면, 결국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출구가 하나 있다. 바로 다운사이징이다. 강남 아파트를 경기도로 옮기고, 그 차액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경기도 아파트에서도 버티다가, 또 규모를 줄여 빌라나 오피스텔로 이사 간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평생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것이고, 사회적 지위의 하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다운사이징을 최대한 미루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점에야 어쩔 수 없이 결정한다.
결국 집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 자체는 나쁜 선택이 아니다. 문제는 '계획 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언제쯤 집을 팔고 어디로 이사 갈지를 미리 설계해두지 않으면, 급하게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거나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집 한 채가 노후 자금의 전부라면, 그 집을 팔고 나면 남은 노후를 이어갈 자산이 거의 없어진다.
주택연금: 집을 팔지 않고 현금을 꺼내는 방법
한국주택금융공사에서 운영하는 주택연금은 집을 담보로 맡기고 매달 일정액을 받는 제도다. 만 55세 이상이라면 가입할 수 있고, 집을 팔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계속 거주하면서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어 60세 기준으로 시가 3억 원짜리 집을 담보로 맡기면 월 약 70만 원 안팎을 평생 수령할 수 있다. 집값이 오를수록, 가입 나이가 낮을수록 월 수령액은 달라지지만, 대략적인 감이 이 숫자에서 잡힌다. 만약 집값이 5억 원이라면 월 110만~120만 원 수준이 가능하다.
주택연금은 분명히 쓸 만한 옵션이다. 다만 몇 가지 현실을 알고 들어가야 한다. 첫째, 집을 담보로 맡기기 때문에 사망 후 집이 금융공사로 넘어간다. 자녀에게 집을 물려주겠다는 계획이라면 맞지 않는다. 둘째, 월 70만~120만 원이라는 금액은 노후 생활비 전체를 커버하기엔 부족할 수 있다. 2인 가구 기준으로 적정 노후 생활비를 월 250만~300만 원으로 잡는다면, 주택연금은 그 일부를 보완하는 역할이지 전부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주택연금은 '집 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의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여러 노후 소득원 중 하나로 미리 포트폴리오에 포함시켜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부동산은 자산이다, 하지만 '유동성 없는 자산'이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부동산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집은 분명히 자산이고, 한국에서 부동산이 장기적으로 보여준 수익률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서울·수도권 핵심 지역의 아파트는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유동성'이다. 부동산은 필요한 순간에 원하는 금액만큼 일부를 팔아서 쓸 수 없다. 주식이나 ETF라면 300만 원이 필요할 때 300만 원어치만 팔면 된다. 그런데 집은 5억짜리 집에서 300만 원만 꺼낼 수 없다. 집 전체를 팔거나, 빚을 내거나, 주택연금에 가입하거나—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런 원칙으로 생각하고 있다. 집은 집대로 유지하되, 집 외에 별도의 투자 자산 포트폴리오를 동시에 키워나간다. 인덱스 펀드, ETF, IRP·연금저축과 같은 세액공제 상품들을 활용해서 매달 조금씩이라도 '팔 수 있는 자산'을 쌓아가는 것. 이게 진짜 은퇴 준비라고 생각한다.
집 한 채만 믿고 나머지를 방치하면, 노후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현금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이 생긴다. 반대로, 집 외에 유동 자산이 충분히 갖춰져 있으면 집을 팔지 않아도 되고, 다운사이징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며, 주택연금 가입 여부도 여유 있게 결정할 수 있다.
내 집 상황이 은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직접 계산해보자
은퇴네비 시뮬레이터에는 '내 집 상황' 섹션이 있다. 현재 집값, 대출 잔액, 예상 처분 시점을 입력하면 집이 내 노후 현금흐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집을 유지할 경우와 다운사이징할 경우, 그리고 주택연금에 가입할 경우를 비교해볼 수 있어서 선택지를 숫자로 비교해보는 데 유용하다.
나 역시 시뮬레이터를 통해 처음으로 '내 집이 실제로 내 노후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집 있으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숫자로 판단하게 됐다. 그게 가장 큰 변화였다.
집값 상승은 분명히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은퇴 준비는 기분 좋음이 아니라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현금으로 판단해야 한다. 집은 그 현금을 만들어주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집값이 올라서 자산이 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퇴 이후에 그 자산이 실제로 내 생활을 지탱해줄 수 있는 형태여야 진짜 자산이다.
'집 있으면 은퇴 준비 끝'이라는 말,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집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참고 자료 및 출처
-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연금 예상 수령액 조회: 한국주택금융공사
-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아파트 가격 동향):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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